지난 11월 26일, 홍콩 왕폭코트의 노후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는 현대 도시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안전망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본지 취재팀은 현장 정밀 조사를 통해 화재 당시 인명 피해를 키운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된 '소방시설 미작동'의 실태와 그 배후에 숨겨진 구조적 원인을 추적했다.

소방시설 작동 불량 스프링클러 생명줄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화재 당시 왕폭코트 아파트 내부에는 분명 스프링클러 헤드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취재팀이 확보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소방 당국의 초기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화염이 거실과 복도를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스프링클러는 단 한 방울의 물도 내뿜지 않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소방 펌프는 심하게 부식되어 있었고, 일부 층의 소화전 호스는 삭아버려 수압을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주민들은 "연기가 가득 찼을 때 경보음조차 들리지 않았고, 스프링클러가 터지길 기다렸지만 천장은 묵묵부답이었다"고 증언했다. 초기 진압에 성공했어야 할 '골든타임' 동안 소방 시스템 전체가 사실상 '장식품'에 불과했던 셈이다.

홍콩 왕폭코트아파트 화재(사진=한국안전뉴스)


왜 소방시설 관리가 되지 않았는가?

홍콩의 노후 아파트 단지에서 소방시설이 이토록 무용지물이 된 배경에는 고질적인 관리 부실이 자리 잡고 있다.

50년 이상 된 건물의 경우 주인이 여러 번 바뀌거나, 건물 관리위원회(Owners' Corporation)가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수리비 분담을 두고 주민 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소방시설 보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노후된 배관 전체를 교체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몽콕의 노후 아파트 주민들에게 수천만 원에 달하는 소방 설비 개선 분담금은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부담이다.

매년 실시해야 하는 소방 점검 역시 서류상의 통과에만 급급했다. 외부 업체에 위탁된 점검은 실제 작동 여부보다는 외관 위주의 확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내부 배관의 폐쇄나 펌프 고장을 잡아내지 못했다.

해당 건물은 올해 4월 실시된 소방 안전 점검에서 이미 '불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적절한 후속 조치 없이 공사가 강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스프링클러 고장인가, 인위적 폐쇄인가?

취재팀은 조사 과정에서 더욱 섬뜩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단순히 기계적 결함으로 인한 고장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소방 밸브를 잠가두었을 가능성이다.

현장 관계자에 따르면, 노후 건물의 경우 스프링클러 배관이 낡아 미세한 누수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로 인해 집안 가구에 물이 스며들거나 공용 관리비(수도세 및 펌프 전기세)가 과다하게 청구된다는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자, 관리인이 아예 메인 밸브를 잠가버리는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고 당시 아파트 내부의 스프링클러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설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장기간의 보수 공사와 관리 부실이 겹친 결과로 분석된다.

건물 보수 공사 과정에서 배관 교체 등을 이유로 스프링클러로 연결되는 주 밸브가 잠겨 있었던 정황이 포착되었다.

또한, 화재 경보기가 오작동할 때마다 발생하는 소음을 막기 위해 경보 시스템 자체를 꺼두는 행위도 비일비재하다.

홍콩 소방처(FSD)의 현장 감식 결과, 화재 당시 수동 발신기(Manual Call Points)를 눌러도 화재 수신반으로 신호가 전달되지 않거나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 등 시스템 결함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이것은 단순 과실을 넘어선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잿더미 위에서 세워야 할 새로운 안전망

반복되는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는 땜질식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시스템 혁신이 필요하다.

주민들의 분담금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홍콩 정부가 노후 건물 소방 설비 교체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는 '공공 안전 기금'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안전은 사적 자산의 문제를 넘어 공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밸브가 잠겨 있거나 수압이 낮아질 경우 소방 당국에 즉시 알람이 가는 스마트 시스템을 노후 건물에 우선 도입해야 한다. 인위적인 밸브 폐쇄를 기술적으로 원천 차단하는 조치다.

화재의 도화선이 되는 '쪽방' 구조를 합법적인 틀 안에서 개선하거나, 거주자들을 위한 공공 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려 위험한 주거 환경 자체를 해소해야 한다.

이는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노후 고층 아파트 역시 스프링클러 미설치나 오작동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방 시설 폐쇄 행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고, 노후 단지의 소방 점검 체계를 민간 위탁에서 공공 점검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왕폭코트 아파트의 굳게 잠긴 소방 밸브는 우리 사회가 안전을 대하는 차가운 태도를 상징한다. 비용 때문에, 혹은 번거롭다는 이유로 잠가버린 것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 생존 가능성'이었다. 잿더미가 된 현장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은 명확하다. 작동하지 않는 안전장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홍콩 노후아파트 취재 장면(사진=한국안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