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잇따른 대형 화재 사고로 인해 국민적 안전 의식이 고취되면서, 화재에 취약한 시설에 대한 정부의 규제 강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많은 시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시설 중에서도 지하 주차장은 그 구조적 특성상 화재 발생 시 대형 참사로 이어질 위험이 매우 크다. 소방차 진입이 어렵고, 연기 배출이 쉽지 않아 초기 진압에 실패할 경우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막대할 수밖에 없다. 이에 정부는 이러한 ‘화재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적 의지를 담아 모든 지하 주차장에 대해 소방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 지하주차장서 충전 중인 전기차 화재 진압.전북자치도 소방본부 제공9일
과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특정소방대상물에만 소방시설 설치 의무가 부여되었으나, 이번 정책 변화의 핵심은 규제 대상을 대폭 확대하여 주거 시설부터 상업 시설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화재 안전 기준을 상향 평준화하고, 기존의 안전 기준 미달 시설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정책은 단순히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넘어,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를 다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책의 주요 내용과 기대 효과: 초기 진압 능력 확보
소방시설 설치 의무화 정책의 주요 내용은 지하 주차장의 면적, 구조, 용도와 관계없이 스프링클러, 소화전, 자동화재탐지설비 등의 필수적인 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기존에는 스프링클러 설치 면제 기준이 적용되거나, 비교적 간소한 소화 장비만 요구되던 시설들도 이제는 강화된 기준으로 무장해야 한다.
특히 지하 주차장 화재의 경우, 차량에 의한 유류 화재 발생 가능성이 높고, 주차장 내부 마감재와 적재물로 인해 연소 속도가 빠르며 유독가스 발생량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할 때, 화재 발생 초기에 이를 감지하고 진압할 수 있는 자동화된 설비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장 큰 변화는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의 전면 확대이다. 이는 화재 발생 시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 공간에서 초기 화재를 자동으로 진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함으로써 화재 확산을 억제하고, 소방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진압의 골든타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피난 및 방화 시설의 강화: 소방시설과 더불어 피난 통로 확보 및 방화 구획 설정 등 구조적인 안전 기준도 함께 강화된다. 이는 화재 발생 시 이용자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고, 화염과 연기가 다른 구획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여 피해 범위를 국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정책이 실질적으로 현장에 정착되면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첫째, 국민 생활 안전 수준의 향상이다.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는 모든 시민은 강화된 안전 시스템의 보호를 받게 된다. 둘째, 화재로 인한 재산 피해액 감소이다. 초기 진압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면서 대형 화재로 인한 시설물 전소나 구조적 손상을 막을 수 있다. 셋째, 소방 인력의 부담 경감이다. 자동화된 소방시설이 초기 대응을 맡게 되면서, 소방관들은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물류센터 화재 사례로 본 '스프링클러 무용지물론'의 이면과 대책
지하 주차장 소방시설 의무화 정책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가운데, 천안 이랜드물류센터 화재와 같은 대형 물류 시설 화재 사례는 소방시설의 단순 설치 의무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천안 이랜드물류센터 화재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설치한 스프링클러가 실제 화재 상황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이른바 '스프링클러 무용지물론'을 촉발했다. 스프링클러 무용지물론의 이면에는 단순히 설비가 작동하지 않은 기술적 결함 이상의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구조적 문제점: 불법 적재와 창고 특성 물류센터와 같은 대형 창고 시설은 일반적인 건물과는 달리 엄청난 양의 가연성 물질(재고품, 포장재 등)이 천장 가까이까지 빼곡히 적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불법적, 또는 과도한 적재는 스프링클러의 방수 패턴을 가로막아 화재 지점까지 물이 도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해한다. 설령 물이 닿는다 하더라도, 화재의 열기가 너무 강해 물이 소화 작용을 하기도 전에 증발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즉, 설계 기준은 일반 화재를 상정했으나, 실제 발생한 화재는 물류센터 특유의 '고적재 화재'라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설비 및 운영 관리 : 운영관리의 문제 단순히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설비가 화재 시 정상 작동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점검 및 관리가 필수적이다. 물류센터 화재의 경우, 소화 펌프의 작동 여부, 밸브의 개폐 상태, 수원의 확보 등 기본적인 운영 관리 소홀이 스프링클러 무용지물론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법적 의무만 충족시키고 실제 효용성을 간과한 채 설비를 방치하거나, 시설 변경 시 소방 기준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관행이 문제다.
맞춤형 소방 설계 도입: 물류센터의 고적재 화재, 지하 주차장의 유류 및 전기차 화재 등 시설 특성에 맞는 특수 소방 설계를 의무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적재 창고에는 천장형 외에도 랙(선반) 내부 또는 중간층에 설치되는 IN-RACK 스프링클러 시스템을 적용해야 한다. 지하 주차장의 경우, 급속도로 확산되는 차량 화재에 대응하기 위한 포말(폼) 소화 설비나 물분무 소화 설비 등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엄격한 적재 및 공간 관리: 물류센터의 경우, 적재 기준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소방시설의 작동 영역을 침범하는 불법 적재를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지하 주차장 역시 지정된 구역 외의 물건 적재를 금지하고, 소방차 진입로와 비상 대피 공간을 상시 확보해야 한다.
통합적인 소방 시스템 구축: 화재 초기 단계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자동화재탐지설비와 스프링클러 시스템이 연동되어 신속하게 소방 당국에 상황을 전파하고 초기 진압을 시작하는 통합 방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하 주차장 소방시설 설치 의무화 정책은 화재 안전망을 강화하는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천안 물류센터 화재 사례가 보여주듯, '설치 의무'만으로는 완벽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설치'를 넘어 '실효성'을 확보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각 시설의 고유한 화재 위험 요소를 분석하고, 이에 최적화된 소방 시설 및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며, 정기적인 관리와 점검을 통해 설비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재 안전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다. 정책 입안자, 시설 관리자, 그리고 시민 모두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기고 김효범 : 한국화재감식연구소장, 한국화재폭발조사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