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공지능(AI)은 단순히 산업의 한 분야를 넘어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와 같은 유례없는 규모의 인프라 투자를 감행하고 있으며, 전 세계는 AI의 두뇌 역할을 할 반도체 공급의 병목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공급자 우위'의 시장 환경은 제조 강국인 대한민국에 거대한 기회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절박한 '골든타임'의 경고등이 켜져 있다.
본인은 평생을 컴퓨터 과학 연구와 화재 감식이라는 정밀 분석 현장에서 보내며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중요성을 체감해 왔다. 화재 현장에서 단 하나의 단락흔을 통해 사고의 근원을 찾아내듯, 지금의 반도체 전쟁에서도 우리는 화려한 수치 너머에 숨겨진 구조적 결함을 직시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 참석하고 있다.
제조의 성벽 위에 '설계의 날개'를 달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강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국가 산단과 SK하이닉스의 용인 클러스터 등 1,000조 원 규모의 민관 합동 투자는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성공이 곧 AI 시대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컴퓨터 구조론적 관점에서 AI 반도체는 단순히 연산 속도만 빠른 칩이 아니다. 저전력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NPU(신경망처리장치)와 메모리 자체에서 연산을 수행하는 PIM(Processor-In-Memory) 기술이 핵심이다. 우리는 제조 역량을 발판 삼아, 데이터의 흐름(Data Flow)을 최적화하는 설계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제조만 잘하는 '파운드리 공장'에 머문다면, 설계 권력을 쥔 글로벌 팹리스(Fabless) 기업들의 하청 기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에너지 효율, '열(Heat)'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라
화재 감식 전문가로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에너지와 열'이다. AI 데이터센터의 확산은 막대한 전력 소모와 열 발생을 동반한다. 이는 하드웨어의 수명을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화재 등 안전사고의 잠재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차세대 AI 반도체는 '전력 효율 극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기존 GPU 대비 전력 소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저전력 설계 기술은 환경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반도체 설계 단계에서부터 열 역학적 안정성을 고려하고, 소프트웨어적으로 전력 소비를 제어하는 알고리즘 최적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진정한 의미의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이다.
시니어의 통찰과 주니어의 실행력이 만나는 '인재 용광로'
최근 인재 유출과 이공계 기피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해 정부가 제안한 '대통령 직속 컨트롤타워'나 '성과 보상 체계 혁신'은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과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시니어 전문가의 귀환'을 제안한다.
반도체와 컴퓨터 공학은 누적된 경험이 중요한 분야다. 80~90년대 반도체 신화를 일궈낸 시니어 전문가들은 복잡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독보적인 통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AI가 수많은 데이터를 생성해내도, 그 답이 현장에서 작동 가능한지, 논리적 오류는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결국 노련한 인간의 몫이다.
시니어의 '문제 해결 능력'과 주니어의 '최신 기술 실행력'이 결합된 공동 연구소나 멘토링 시스템이 활성화된다면, 대한민국은 인적 자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지능형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뼈아픈 현실 직시하라! '반도체 1등'의 착각과 인재 공동화 현상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에 취해 정작 거대한 AI 폭풍에 대응할 시기를 놓치고 있다. 냉정하게 진단하자면, 대한민국의 AI 경쟁력은 미국과 중국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드웨어 제조 능력은 세계 수준일지 몰라도, 그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핵심인 AI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 생태계는 처참한 수준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재 양성의 토양' 자체가 척박하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는 오픈AI, 구글, 엔비디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변변한 AI 기업'이 단 하나도 없다. 기업이 없으니 실전 데이터를 다룰 기회가 없고, 시장이 없으니 제대로 된 교육을 수행할 대학도 부족하다. 대학은 구태의연한 이론에 머물러 있고, 기업은 당장 써먹을 인력이 없다며 아우성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결국, 한국에서 미래를 찾지 못한 최정예 인재들은 실리콘밸리나 중국의 빅테크 기업으로 떠나는 '인재 엑소더스(Exodus)'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국내 대학원 창업이나 연구실의 성과가 산업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해외 기업의 인재 채용 창구로 전락하고 있는 이 현실이야말로 대한민국 AI 반도체 전쟁의 가장 큰 구멍이다.
정부는 단순히 보조금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천재적인 인재들이 국내에 머물며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거대 AI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국내 팹리스 기업과 AI 스타트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제를 혁파하고, 대학 교육 체계를 산업 현장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하는 '특단의 대책' 없이는 반도체 1위의 영광도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통찰력이 만드는 'AI 시대의 새로운 전문가'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이 정답인지 알아보는 눈'이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답을 내놓아도, 그것이 실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우리 시니어들은 수십 년간 현장에서 쌓아온 독보적인 전문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비록 AI 기술의 출발은 늦었을지라도, 우리가 가진 '정답을 찾아내는 지혜'를 AI라는 강력한 도구에 결합한다면 반전을 꾀할 수 있다. 복잡한 기술적 구현은 AI와 주니어들에게 맡기되, 시니어는 자신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고 최종 판단을 내리는 'AI 슈퍼 전문가'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시니어의 지혜가 해외로 떠나려는 청년 인재들과 결합하여 국내에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AI 반도체 골든타임은 기회로 바뀔 것이다.
결론 : 지혜로운 결단이 미래를 만든다
대한민국 반도체, AI 산업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2026년 현재 우리가 쥐고 있는 카드는 영원하지 않다. 컴퓨터 과학의 논리적 치밀함과 AI 인재양성, 시니어 전문가들의 지혜, 그리고 정부의 파격적인 생태계 조성 의지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
우리가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인재 유출을 막으며 AI 주권을 확보한다면, 대한민국은 단순히 칩을 파는 나라를 넘어 전 세계 AI 문명의 '지능적 심장'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라,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해 정답을 향해 과감하게 실행에 옮겨야 할 때다.
김효범 한국화재감식연구소장, 한국화재감식학회 이사